I Think
겨울나무들....
강갑준
2006. 1. 21. 14:06
겨울은 모든 생명들에게 신산한 계절이다. 잔혹하리만치 춥고 지루하고 답답하다. 생명이 없는 것들도 나기 힘들기는 한가지일 것이다. 겨울을 나려는 몸짓들이 처절하다. 제 몸을 쉴 새 없이 바위에 부딪치며 죽음의 잠을 떨어내는 바다의 출렁임, 천 년을 눈 부릅뜨고 앉아 있는 바위의 침묵….
겨울 속에 서면 한낱 미물일망정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찬바람과 눈발 속의 생명은 참으로 숭고하여 눈 시리게 아름답다. 겨울엔 한 마리 새의 비상마저 심상한 것이 아니다. 세찬 맞바람에 날아올라 날갯짓이 힘찬 것―그대로 그들의 삶의 방식일진댄 그 치열한 실존 앞에 숙연해질밖에 없다. 바람 몰아치는 들판에서 갈기 세워가며 풀을 뜯는 마소들이며, 숲으로 날아드는 까치떼의 이동인들 어찌 예사로운 일이랴.
그 중에도 나는 나무들의 겨울나기에 더욱 가슴 졸인다. 대책 없이 몸을 놓아 제 뼈 갉으며 켜는 바람의 소리를 들어야 하는 나무들의 고통. 생살 찢는 아픔을 참아내는 그들 앞에 말을 잃는다. 조금 춥다고 몸을 움츠리는 우리는 얼마나 나약한 존재이며, 두껍게 껴입고도 추위에 제 몸 하나 추스르지 못하는 우리의 겨울나기는 얼마나 사치스러운 것인지.
아파트의 나무에 눈을 준다. 현관 옆 단풍나무는 수천의 잔가지들이 어깨를 비비며 바람 앞에 문지기처럼 버티고 서 있다. 각질같이 굳어버린 가지들이 언제 줄기로 범접해 내릴지 모를 한기를 막아 나선다. 야생적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있는 모습이다. ‘줄기가 얼어붙으면 안 된다, 줄기를 끌어안아야 한다’고 외치는 것 같다. 그들 앞에 설 때, 생존은 엄숙하고 찬연하다.
베란다에 난들도 잔뜩 긴장해 있다. 베란다 문을 열면 칼바람을 막기 위해 앙가슴 헤쳐 놓고 저항한다. 난 잎 하나까지 바람에게 바쳤으니 더 이상은 안 된다는 절규가 겨울 밤 베란다에 자지러진다.
키 큰 이름모를 나무 한 그루가 현관앞에 8여년전 부터 서 있다. 간밤 베갯맡에서 뒤척이는 소리를 들었지 않은가. 실존의 몸 에 가슴 아렸다. 그래도 그 큰 부채 손 벌려가며 고개 쳐들어 희망을 놓지 않는 그 천성이 대견스럽다.
아파트 조경으로 서 있는 감나무라고 온전하게 놔둘 겨울이 아니다. 조막만한 열매며 마지막 잎까지 내놓더니 이젠 걸칠 것 하나 없는 가난뱅이가 되어 잿빛 하늘 아래 서 있다. 훌훌 다 버리고 나면 저렇게 깔끔할까. 남루 한 자락 걸치지 않았는데도 비단 두른 왕후장상 못지않아 보인다.
칼바람에 시달리고도 아직 잎사귀를 달고 있는 대추나무의 질긴 근성엔 혀를 두르지 않을 수 없다. 뿌리의 번식력에 질세라 잎을 단 채 겨울을 나는 고엽(枯葉)에서, 물러서지 않는 이 시대의 양심을 대하는 것 같다. 지기 마련인 잎이 아직도 지지 않은 데는 그만한 사연 하나쯤 간직해 있으리라.
소나무며 동백, 옷만 둘렀지 온몸을 겨울의 찬 하늘 아래 내놓았다. 그들의 겨울나기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몸 옹송그려 어깨에서 내린 고단한 하루에 허리가 휠 만큼 휘었다.
나무들 위로 눈이나 소복이 쌓여으면 한다. 포근한 솜이불을 덮은 것 처럼 따뜻할 것같다. 바람에 분질러진 몇몇 가지들은 하얀 거즈로 싸맨 것 같아 모처럼 마음 따뜻할 것이다. 하지만 적설의 아름다움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나무들은 다시 겨울 앞에 맨몸으로 서 있어야 한다. 자연의 질서에 순응하려 입 앙다문 그들 앞에 절로 고개가 수그러든다.
겨울바람 속에서 이 순간도 나무들은 외치고 있다. 귀를 열면 언뜻 언뜻 들린다. 낮은 음계를 밟고 귓전에 닿아 부서져 내리는 소리, 고통을 하소연하는 소리다. 하여도 그들은 봄이 오는 길목에 서서 생명의 맥락을 끝까지 놓지 않을 것이다.바람을 뚫고 겨울나무들의 외침이 들려온다. 눈을 감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