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Think

땀을 쏟으면 여름이 향기롭다

강갑준 2005. 6. 2. 22:22

거대한 캔버스에 초록 물감을 확 풀어놓은 것 같은 색소의 전시장―여름은 우리를 풍덩 진초록 물감 속으로 담가 놓는다. 발목을 담그고 손을 담근다. 머리와 가슴과 영혼을 담근다. 봄날 어느 교외에서 만났던 찰랑한 연둣빛의 경이, 기어이 사람의 걸음을 붙잡던 그 느티나무 잎에 녹음이 짙게 내려 여름이 깃발처럼 펄럭이고 있다.

이 초록의 성장(盛裝)은 단지 바깥의 객관적 현상에 그치지 않는다. 보는 이의 눈을 씻고 가슴을 틔워준다. 고단한 실존적 삶을 어루만지는 바람으로, 혹은 일상의 나태를 흔들어 깨우는 죽비를 들고서 선뜻 여름은 우리 앞에 오는 것이다.

여름이 다만 색소의 계절만은 아니다. 태양의 이글거림, 우리들 머리 위의 그 뜨거운 열정이야말로 여름이 살아 숨 쉬고 있음의 극치다. 격렬성의 어떤 계시가 아닌가.

여름은 어깻죽지에 비를 거느린다. 어제 내린 비는 초목군생의 깔깔한 목을 축여주고 흙에 생명의 새 기운을 불어넣는다. 불타는 태양에 비는 참으로 조화롭다. 여름이 장대비를 몰고 올 때, 우리는 그 빗속에 일상의 찌든 때를 자근자근 씻어 내린다.

그렇다고 여름의 비가 다소곳이 얌전만 떨지는 않는다. 음산한 그늘을 이끌고 와 먹장구름을 덮으며 천지개벽할 것처럼 진노하던 하늘이 한바탕 우박을 쏟아 붓는다. 여름날의 우박은 우리를 놀라게 한다. 우박의 낟알 하나하나 그 낱낱의 저돌성, 그 거침없는 당당함 앞에 사람들은 주눅 들어 실로 자신의 무력과 미욱함을 경험하게 된다. 얼마나 호쾌한가.

여름은 바다를 빼놓을 수 없다. 초록에 청람을 덧칠하며 느긋이 누워 있는 바다는 출렁이는 여름의 너른 품이다. 까뮈의 ‘이방인’에서 주인공 뫼르소가 어머니 상을 치르고 나서 처음 찾은 곳이 8월의 바다가 아닌가. 슬픔, 고뇌, 외로움을 차별 없이 끌어안는 바다는 무더위에 부대끼는 인간들에게 어머니 같은 서늘한 위안이다. 바다에 서면 사운거리며 뭍으로 뭍으로 달려드는 파도와 만난다. 거기서 한 발짝 다가서면 파도는 섬의 무엇엔가 발목 잡히며 자꾸 수평선을 지워가고 있다. 이 실존이 무화(無化)하는 현장에서 우리는 울 수도 있고 웃을 수도 있다

여름 한철을 장식한다고 산의 손길은 분주스럽다. 인자(仁者)가 좋아하는 산, 그 중에도 여름산은 자체가 소우주다. 철철 흘러넘치는 석간수가 산의 숨결을 담아내고, 숲 속의 새들은 시시각각 몸을 세워 춤추는 나뭇가지 우듬지에 앉아 여름의 찬가를 흥겹게 주절거린다. 산을 오르는 사람들은 여름에 겸손할지언정 결코 방만해질 수가 없다. 뿌리 내린 것들에서 날고 기는 것들에 이르기까지 갖은 식생을 보듬어 안은 한여름 산의 표정이야말로 사뭇 진지하고 푸근하고 위의 있다.

초록, 태양, 비, 우박, 바다, 산―차오르고 불붙고 스며들고 후리치고 눕고 치솟는 이 모든 것들을 품어 온 여름은 끝물에 그 빛과 소리와 꿈틀거림을 가을에게 넘겨준다. 완성 지향의 빌미를 장만하는 여름의 미덕이다.

땀처럼 향기로운 것이 있을까. 땅속에 갇혀 10년 기다림 끝에 찾은 빛 세상. 그 속에 앉아 겨우 일주일을 시종 울기만 하다 한 생애를 마감하는 매미의 맹렬한 울음은 우리를 처연케 한다. 그 소리에 귀 기울일 양이면 비지땀도 절로 식는다.

여름은 땀을 쏟는 계절이다. 뙤약볕 더위 속에 수박 크듯, 흘린 땀만큼 만물이 성숙하는 계절이 여름이다. 여름 속의 땀은 삶의 표상 언어다. 땀을 쏟으면 여름이 향기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