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운남성 곤명, 여강 여행기
2006년 2월2일부터 7일까지 운남성 곤명과 여강, 고성을 다녀왔다. 여강의 길이 아름답다는 것과 옥룡설산이 웅장하고 신비스럽다는 이야기 듣고 나선 여행길이었다.
생각하면 여강의 정겨움이 지금도 마음을 사로잡았다. 흙벽돌에 기와를 얹은 시골마을의 중간을 흐를는 물, 너비와 깊이가 약 1미터 정도씩인
유행상품이 넘치는 국제적인 상업도시 上海((상햐이)
상해의 거리라든지 명소는 당초 여행계획에 포함되어 있지 않아, 그저 ‘상해 임시정부’만 들르기로 한 스케줄이어서, 거쳐 가는 수순이었다. 가이드의 설명으론, 꼭 상해에 와서 볼걸이로는. 상해의 최대의 번화가 남경로를 말한다. 그의 말로는 ‘중국은 지저분하고 촌스럽다’는 편견을 가지고 계신분이라면 다음기회에 한번 상해를 여행하길 권하고 싶다고 말한다. 특히 상해의 최대 번화가라고 할 수 있는 남경로를 거쳐 외탄과 황포강 너머의 푸동지역을 보게되면‘중국은 최고를 멋지고 화려한 나라다’라는 또 다른 편견을 가지게 될지도 모른다.’ 고 말한다.
그중 남경로는 상해 제일, 아니 중국최대의 번화가라해도 과언이 아닌 곳으로 총길이 5km가 넘고 각양각색의 상점과 레스토랑, 백화점, 호텔들이 위치하여 주말이면 발을 디딜 수 없을 정도로 붐빈다. 남경로는 인민공원을 기준으로 동과 서로 나뉘는데, 남경동로에는 제일백화점을 비롯한 여러 백화점들과 패션 상점들이 있고, 남경서로에는 중국전통공예품과 차를 파는 상점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더붙여, 한국의 명동에 비견될 수 있는 이곳은 거리폭이 명동의 두배정도는 되어서 걸어다니기가 훨씬 편하고 또한 차가 다닐 수 없는 대신 그 사이로 미니열차가 수시로 관광객과 쇼핑객을 태우고 다닌다. 또한 거리 중간중간마다 쉴수 있는 넓은 의자들이 있어 지친 다리를 쉴 수 있게 해준다. 주말이나 휴일에는 그 길고 넓은 거리도 사람으로 가득차니 가능하면 평일에 여유롭게 쇼핑을 즐기는게 좋다. 하지만, 우리가 역사시간에 배웠던 1842년 남경조약으로 개항된 이후 국내외의 새로운 문물을 흡수해 온 국제적인 상업도시이다. 영국에 의해 중국최초로 개발될 당시 서방에 개방된 첫 항구도시요. 오랜기간의 외국조계지로 화려한 모습속에 이방인이 될 수 밖에 없었던 상해는 1945년 중국이 공산주의국가로 재탄생한 이후부터 등소평에 의한 개혁개방정치이 실시되기 전까지는 중국의 여느도시와 같이 별다른 발전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개방이후 90년대 중앙정부가 이곳에 집중적으로 투자를 시작하면서 동양의 또 다른 홍콩을 꿈꾸기 시작하였고, 지금은 세계적인 경제중심 도시가 되었다.
중국에 관한 선입견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상해는 새로운 눈을 열어주는 도시이다. 상해의 고층빌딩들은 다양한 디자인의 건축물을 장려하는 시정책에 의해 기발한 디자인으로 상해 스카이라인을 장식하고 있으며 과거 조계지로서의 흔적이 남아있는 외탄과 황푸강 바로 건너편 들쑥날쑥 쏟은 현대적 고층빌딩은 상해의 과거와 현재를 강 하나사이로 이어주는 듯한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6.000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는 상해의 총면적은 6,184km이며, 1.200만명이 넘는 인구를 가지고 있지만 그중 640만명은 도시의 외곽지역에 살고 있다. 역사속에서 중국의 어떤 도시보다 사양의 문물을 빨리, 쉽게 받아 들인 곳이기에 중국의 다른 도시와는 색다른 문화를 접할 수 있으며, 다양한 볼거리, 놀거리, 먹을거리로 수많은 관광객을 유치하고 있다.
중국속의 한국 ‘상해 임시정부’청사 가다
2일 상해에 도착후 바로 상해임시정부로 향했다. 가는 길마다 도시계획에 따른 철거작업과 도로확장 공사가 한창이었다.
우리가 임시정부로 알고 찾아가는 곳은 마당로(馬堂路)에 있눈 3층 벽돌집으로, 1926년부터 윤봉길의사의 의거가 있었던 1932년직후까지 청사로 사용하던 곳이다.
매우 낡고 도로옆에 위치해 있어서 언뜻 보면 쉽게 지나쳐 버릴 수도 있을 만큼 초라하지만, 하루에도 많은 한국인이 관광객들이 찾는 명소인 듯 하다.
1층에서 짧게 비디오 시청을 하고 나면 2층과 3층의 전시관을 관람하게 된다. 전시관내에는 당시 쓰였던 가구, 서적, 사진 등 전시되어 있어서 자료를 유심히 살펴 보는 것 또한 좋은 공부가 될 것 같았다. 건물내에는 작은 상점을 운영하여, 청사 유지비를 마련하고 있는데, 우표, 악세사리, 장식품 등 기념품을 한족(韓族)들이 팔고 있었다. 전시실의 사진촬영은 금지되어 있었고, 그 어려운 때에 독립자금을 받아, 좀 호화판생화를 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어 씁쓸한 마음을 버릴 수 없었다.
중국 운남성(云南省) 옥룡설산(玉龍雪山), 영원한 기쁨
여행일정
2006년 2월2일부터 2월7일까지
2일12시40분 중국 민항 MU 5044편을 부산 김해공항 출발
오후 13시20분 상해(푸동공항) 도착
오후 14시 20분 1)임시정부 청사 방문
2)상해시 보타구청 방문
오후 20시10분 상해에서 중국민항편로 곤명향발
오후 23시10분 곤명공항 도착
바로 ‘사꾸라 앵화’호텔 도착
3일 곤명-려강
*리프트로 운삼평-계단을 따라 옥룡설산 분지까지 걸어간다.
4일 석림-구향동굴-곤명
*호텔 조식후 운남성이 자랑하는 석림관광, 중식후 운남성 최대 석회동굴 구향동굴 관광
이번 중국 여행을 하면서, 법구경의 ‘길을 떠나가더라도 자기보다 나은 사람, 또는 비슷한 사람이 아니면 혼자 가는 것이 낫다, 그러므로 어리석은 동반자를 골라서는 안된다.’는 것과 ‘여행은 사람을 겸허하게 한다. 세상에서 인간이 차지하고 있는 인간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가를 깨닫게 하기 때문이다.라는 프랑스의 소설가’G. 플로베르.의 글귀를 생각게하고 있다가, 바삐 결정한 여행이다.
이번 여행에 ‘심광체반(心廣體胖)을 느끼게 했다. 풀이하면 ‘마음이 너그러우면 몸이 편안하다’는 것이다. 여행을 하면서 비행기를 3시간 반 동안 밤에 타보는 것도 처음이고, 6일 여행중 무려 14시간을 비행기로 이동한 것도 잊지 못할 추억이다.
중국이 크고 웅장하다는 느낌을 받은 날들이었다. 사람들은 깨끗하다는 느낌이 없었고 자전가가 많았고 자본주의를 받아들이는 과도기에서 아이들까지 동원하여 돈을 벌려는 사람들이 있었고,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다. 자연자원은 정말 많았고 그것이 국가경쟁력이 될 것 같았다. 개방과 개발을 마구하고 있었다.
소수민족이 살고 있는 운남성을 여행했다. 이곳은 아직은 많이 관광지화 되지 않은 곳이었지만
중전(샹그릴라)의 소포탈라궁과 백탑해... 장족의 자치주의였다.
라마승이 나오는 집안은 그 가문의 명예로 여기고 매장방식이 수장(물에 띄워서 보냄)과 조장(시체를 까마귀에게 던져줌)이었다.
자연에서 나서 자연으로 돌려주는 방법이었다. 해발이 높아 산소가 부족하여 고산병에 걸린다고 한다. 걷는것도 천천히, 숨도 천천히 쉬라는 말을 설마 하다가 내가 걸릴라 걱정이었다. 그것뿐이랴...두통, 가슴 답답함과 구역질.
여강의 옥룡설산의 만년설, 운삼평,백사백화, 고성... 만년설이 있는 옥룡설산이 보이는 고성, 여자가 농사짖고 남자가 집에서 독특한 상형문자로 공부하고 여지기 경제권을 가지고 있는 여권이 쎈 모계사회인 나시족의 자치주의였다. 길바닥이 돌로 되어 있는 고성의 운치를 느끼게 하는 곳이었다. 옛날에는 물물교환의 장소로 쓰였던 경제도시였다고 한다. 한번 더 가보고 싶은 곳이다.
려강(麗江 玉龍雪山)(5,596m)
려강이라고 하면 강을 연상하기 쉬우나. 이는 운남성 북쪽에 있는 해발 2000-2500m에 있는 분지로 소수민족인 나시족(納西族)이 사는 자치현(自治縣)을 말한다.
위치는 중국 운남성(云南省)이고 높이는 5.596m 이다. 려강의 옥룡설산의 만년설(萬年雪), 운삼평, 여자가 농사짖고 남자가 집에서 독특한 상형문자(象形文字)로 공부하고 여자가 경제권을 가지고 있는 여권이 쎈 모계사회이다. 산세가 남북으로 뻗어 있으며 길이가 35km, 폭 12km에 달한고 한다. 이산은 려강에서 약40분 소요된다. 옥룡설산의 만년설과 빙하(氷河)는 불과 10여년전만 해도 온 산을 덮었으나 지금은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윗부분만 덮혀있으며, 기상학자들은 인간의 화석연료사용으로 인한 지구온난화로 인하여 약 40년후에는 이 산의 만년설과 빙하는 완전히 사라진다고 한다.
옥룡설산에 오르기 위해 아침6시경 호텔을 나섰다. 설산에 오르기 위해선 리프트를 타고 운산평에 내려 약 20분정도 걸으면 된다. 벌써 리프트를 타기위해 줄을 이리저리 서 있어 족이나 약3시간 정도 걸려야 탈 수있을 것 같았다. 밖에서 옥룡설산을 보니, 감동 그 자체였다.
쿤밍(昆明)
인구 약 380만명으로 운남성 중국 남서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성도는 쿤밍이다. 북위 21-29도, 동경 97-106도에 위치하고 있으며 북회귀선이 운남성 남부를 지나고 있다.
운남성의 동부에는 꾸이조우(貴州)성과 꽝시쫭(廣西)족 자치구가, 북부에는 쓰촨(四川)성이 인접해 있고 서북부에는 시장(西藏)지치구, 서부에는 미얀마, 남부에는 라오스와 베트남이 있다.
운남성과 인접국가의 경계선은 약4천Km이다. 운남성은 고원산지로서, 칭장(靑藏)고원의 남부에 해당되는데, 평균고도가 해발 2000m에 이르고 서부산맥과 협곡으로 지형이 되어있어서 험난하다. 북부는 평균 3000-4000m, 남부는 1500-2000m로 고도차이가 크다. 서북방향으로 산맥은 줄지어 있는데 동남쪽은 상대적으로 낮다.
대리석으로 유명한 대리의 창산과 이해(바다같이 넓은 호수라 하여 바다해자를 쓴다고 하더라)의 유람선관광, 삼탑사 백족이 살고 있는 곳이다. 대리국으로 살다가 쿠빌라이칸에의해 정복당해 중국에 편입되었다고 한다. 창산에서 바라본 이해는 장말 낭만 그 자체였다.
사계절이 중국에서 제일 따뜻하여 항상 꽃이 피어 있다는 곤명, 이곳은 정치, 경제, 문화, 교통의 중심지라고 하는 오랜 역사를 가진 곳이라고 한다. 그레도 일교차가 커서 따뜻하게 입고 다니다가 더우면 벗어야 하는 곳이었다.
누어 있는 닮았다는 서산, 넓은 바다같은 호수인 곤명호. 위의 둘을 배경으로 시인이나 문장가들이 모여서 글을 썼다는 대관루, 서산에 가는 길에 늘려있는 기면품 가계에서 조각을 하는 것 것처럼 앉아 있는 처녀앞에 서 있으니 저것은 속임수라고 한다. 중국은 소이는 것이 생활화되어 있다는 말을 듣고 조심스럽게 중국인을 대했다.
대리
산과 거대한 호수 사이에 넓은 평야를 가진 대리, 대리는 쿤밍에서 서쪽으로 400km, 미안마 국경에서 불과 150km 떨어진 곳으로 히말리야 산맥의 한줄기인 창산에 자리잡고 있다. 대리는 운남지역의 옛 중심지이며 오래전부터 백족들의 삶의 근거지였다. 대리석이 많이 나서 도시 이름도 대리라고 불리고 있으며 지금도 30개의 광구에서 세계에서 가장 질이 좋은 대리석이 채굴되고 있다. 대리는 13세기 몽골의 침략을 받기전까지는 서남 실크로드의 중심지로서 남조- 대리왕국의 수도로서 500여년간 번성했던 곳이다. 1.900m에 위치한 대리의 주민은 대부분 백족이다. 56개 소수민족중에세 흰 것을 좋아하고 찰떡, 김치, 마늘을 먹는 것이 조선족과 비슷하다. 대리관광은 경관의 관광뿐만 아니라 역사관광, 민족관광인 셈이다. 삼국지의 제갈량이 맹획을 7번이나 잡았다가 놓아주는 곳이 이곳이며 맹획이 바로 백족의 선조라 하는 이족이다.
대리에는 삼도차가 유명하다. 쓰고 달고 무덤덤하며 씁쓸한 세 가지 맛의 차를 마신다. 이는 인생의 과정을 의미한다고 하는데 사람 태어날 때는 괴로워 울면서 태어난다. 그래서 첫 번째의 차 맛은 쓴 맛이다. 중년이 넘어가면서 행복한 시기가 온다. 이때는 단 맛이며, 말년은 인생을 다 살고난 후의 쓸슬하고도 무덤덤한 인생의 의미를 차맛으로 나탄낸다. 운남성은 94%가 산간지방이며 26개의 소수민족이 모여 살고 있다. 오후 시간에는‘삼도차’와 민속쇼를 관람했다. 여강에서 대리로 가는 길에는 고산지대의 농촌풍경을 한껏 구경할 수 있었다. 2.600m 고산지대의 녹색초원, 멀리보이는 구름과 촌마을모습, 염소와 양떼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다. 나는 중국 이 지방에 ‘운남설소’라는 난을 알고 있어. 몇 촉 살 요량으로, 화훼파는 곳을 찾았으나. 보이지 않았다. 가이드도 그런 것은 잘 모른다 했다. 그러나 이 길로 가다 보니, 가끔 난을 산채해 길기에서 팔고 있는 것을 볼수 있었다. 그러나 나를 위한 여행이 아니라. 그대로 지나쳐 버렸다. 아쉬운 감이 지금도 남는다. 멀리 보이는 구름에 빠쁜 것 없는 농촌정경은 우리 60년대를 보는 것 같았다. 대리시에 들어서자 백족을 상징하듯 집벽도 흰색이다.
이해(耳海)로 갔다. 이곳 대리의 자연경관 중 아름다움의 으뜸을 말하라고 하면 단연 ‘얼하이 호수’를 말할 수 있다고 한다. 중국에서 두 번째로 큰 호수로 사람의 귀처럼 생겼다고 해서 이해(耳海)라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바다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그 규모가가 크며 해발1.972m 고원에 위치한 호수로 창산을 뒤로 하고 있다. 유람선을 빌려 약40분간 관광하였다. 조그만 호수이나 바다가 없는 곳이라, 풍광은 아름다웠다. 바람이 살랑거려 조금 호수 깊은 곳으로 갔다가 뱃머리를 돌린다. 산에 구름이 두둥실 거리며, 산 자락엔 아직 덜 녹은 눈이 시야에 들어온다. 경치가 그만이다.
숭성사(崇聖寺 三塔,
대리 고성에서 북서쪽으로 1.5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탑으로, 하얀 탑신이 멀리서도 눈에 띈다. 정직 명칭은 숭성사삼탑, 3개의 탑 중에서 약 69m 높이의 16층탑이 가장 큰데, 특이한 건축 양식이었다. 나머지 2개는 42m의 10층탑이다.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9세기에 건축된 3개의 탑이라 한다.
하늘이 쾌청한 날이면 4.000m의 창산(蒼山)이 작은 호수에 비치는 모습이 아름답고 가이드는 설명한다. 바로 북쪽에 위치한 나시족의 민속마을 희주(喜州)를 찾았다. 이곳은 나시족이 건축양식을 잘 보존하고 있는 지역이라 한다. 집들은 3면이 방이고 한면이 벽인 형태로 백색과 흑색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각 벽에는 산수화가 그려져 있으며 독특한 형태를 보이고 있다.
石林(대석림, 소석림)
-천하 제일 奇觀의 명승지
석림 말 그대로 바위의 숲이었다. 원래 바다였지만 2억8천만년전의 지각 변동에 의해 석회질의 암반이 변형되기 시작하여 해면으로 노출된 부분이 비바람에 의한 침식과 지열등의 영향으로 깍이고 깍인 결과, 지금과 같은 모양으로 된것이다.
중국남부 윈난성의 성도인 쿤밍에서 가장 큰 볼 거리는 ‘석림’이란 말을 듣고 기대를 했으나. 말 그대로 돌들이 삐죽삐죽 서서 숲처럼 서 있는 놈들이 모여 있는 곳인데, 볼거리는 생각보다 없다. 신기한 것은 풍화작용으로 석림에는 다 저렇게 일정한 가로 방향으로 끊어졌다가 그 위에 도시 머리를 얹은 것 마냥 이어져 있는 모습이 쭈~욱 이어져있다.
한마디하면, 중국여행의 가장 큰 어려움은 이놈의 입장료인 것 같다. 석림처럼 자연적으로 생겨난것도 울타리 쳐놓고 무조건 돈을 달라한다. 철이 춘절이라, 중구사람들이 이곳을 보려 인산인해였다. 서로 밀고 밀며 좁은 길을 갈려니 땀을 흘리면서 아귀다툼하는 것처럼 가야하는 괴로움이였다. 그것 뿐이랴. 수석에 토기문양을 그려놓고, 이것 얼마요? 물어보면, 처음에는 8만원 하든 것이 5천원까지 내려가는 기이한 가격, 그것 하나 팔려고, 계속 딸아 다니며 깍고깍고 흥정을 할려한다. 어느곳이나 가면, 아낙들이 물감들이 앞치마를 들고 관광객을 따라 다니며, 사라고 졸라댄다.
원시인이 살았다는 구향동굴, 종유석과 석순이 있었다. 한국으로 돈을 주고 사서 모두 가져갈 수 없는 자연자원이었다.
다양한 민족을 다스려야 한다는 것도 중국의 문제점인 것같았다. 사람이 살아가는 것도 다양하다.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잘 사는 것인가? 우리도 우리사회의 도그마에 빠져살고 있지는 않는 지 나를 객관화해 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흑룡담에 갔다. 아름다운 정원이다. 햇살도 따스하고 동네 할머니들이 민속공연을 하고 있다. 나 오는 길에 동파민족문화 예술 이라는 간판이 있는 곳에 들어가 봤다. 동파하는 지혜있는 자를 가리키는 말이라고, 조선족 안내인이 설명한다. 서예가들이 작품이 전시장처럼 건물 둘레에 전시, 가격도 붙여있어, 판매를 하고 있다. 가격이 비싼 편이다. 작품하나가 얼마인지를 들여다보니, 약 20만원이 넘었다. 비싸다 하니 안내하는 아가씨가 작가에게 전화로 연락, 염가로 주겠다고 했다. 일행중 동파선생이 쓴 작품을 10만원주고 사는 분도 보였다. 특히 동파상형문자를 쓰는 갓쓴 노인이 안경넘어 우리를 쳐다 보는 눈이 예사스럽지 않았다.
백사고성에 갔다.
이곳의 왕들이 목(木)씨 성을 가져서 성주위에 벽을 쌓지 않는다고 가이드가 설명한다. 곤(困)이 되니까 그렇다한다. 그러나 벽에 그려진 상형문자 보면 볼수록 재미있다. 그림도 가옥양식이며 정원도 고풍스런 모습이다. 특이 종교가 이채롭게 느껴 졌다. 성스러운 곳이라는 허름한 건물에 라마교, 불교, 도교를 표시한 그림을 붙여놓고, 종교의식을 하는 곳이다. 카메라를 들여대자. 촬영금지라고 했다. 그러나 관리인이 눈을 돌리는 사이, 한컷했다. 중전(샹그릴라)의 백탑해... 장족의 자치주의였다. 라마승이 나오는 집안은 그 가문의 명예로 여기고 사후는 매장방식이 수장(물에 띄어서 보냄)과 조장(시체를 까마귀에 던져줌) 이었다. 잔여에 나서 자연으로 돌려 보내는 방법이었다. 해발이 높아 산소가 부족하여 고산병에 걸린다고 한다. 걷는 것도 천천히, 숨도 천천히 쉬라는 말을 가이드가 한다.
여강 대리(大理) 고성(古城)
대기 고성이 있는 여강은 마르코폴로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을 간직한 곳이라 극찬한곳으로 ‘아침에 좋고, 저녁에 좋고, 비오는 날에도 좋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어름답다. 중국의 소수민족 나시족은 옛날부터 여강의 빼어난 풍경과 온화한 기후,를 그들의 이상향으로 그려보면 살고 있다.
800년 된 고성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관광지이다. 시내를 흘러가는 맑고 깨끗한 시냇물은 아름답기 그지없다. 한마디로 고성은 ‘아름다움을 간직한 도시’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곳 여강에는 ‘나시족’이 대부분이며 나시족이 역사상 478년이나 이 지방을 지배하였다고 한다. 여간은 교통과 상업의 도시로 발달했는데 차마고도(茶馬古道)의 중심지로 곤명의 차, 사천성의 비단, 베트남의 비취, 티뱉의 우유가 이곳에서 물물교환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단연 관광도시로 탈바꿈하였다. 1996년 옥룡설산에 3.000여명이 죽은 대지진이 있었다. 중국 최고 지도자들이 이곳을 방문하게 되고 역강이 아름다움에 놀라 그 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1998년에 공항이 개설되고 1996년에 있은 곤명 원예박람회도 이곳을 관광지로 비약하는 큰 계기가 되었다 한다. 여강은 요즘 중국 최고의 관광지로 끄고 있는데 하루 관광객이 3만명이 넘는다고 한다. 여강시내에 호텔이 78개나 된다고 하니 짐작이 간다. 1997년에 여강고성이 새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는데 중국의 29개 세계문화유산중 28개는 한족이 도시에 있고 유일하게 소수민족(나시족)의 도시에 세계문화유산이 있는 셈이다. 여강고성은 주위가 모두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성이 없는 특이한 곳이다. 대신 미로(迷路)로 되어 있어 외침 때 황제의 굴을 찾지 못하게 설계 되어 있다고 한다. 아름다운 여강고성 내부를 오전 10시경에 관광하니 편리했다, 상점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이곳은 대리국이 도읍지였을 때 축성되었던 성의 흔적으로, 현재 대리 도시 전체를 감싸는 듯한 성벽의 일부와 남문과 북문이 남아있다. 성으로는 남문과 북문을 통해 올라갈 수도 있다. 성벽 안의 대리 시내에는 1-2층의 낮은 민가들이 죽 늘어서 잇다. 검은 지붕과 하얀벽이 대조적으로 보이는 이 모습에서 오랜 역사의 흔적을 예상할 수 있었다. 남문에서 북문까지 30분정도 산책하면서 집집마다 크고 작은 정원으로 잘 꾸면진 주택을 볼 수 있다. 길바닥이 돌로 되어 있는 운치, 옛날에는 문물교환의 장소로 쓰였던 경제도시였다고 한다. 이곳을 다 둘러 볼려면 7-8일이 걸린다 한다. 가는 길목에서 지난해 한국을 방문, 문화방송에 출연했다는 구필(口筆) 서예가 점포에 들였다. 보라하듯이 붓을 입에 물고 일필휘지를 한다. 가격은 글 넉자에 10만원, 잘쓴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상업성이 많은 것 같다. 3시간여 이골목 저골목 돌아다녀봤다. 서울 인사동 골목에 중국물건이 혹시 이곳에서 가져다 파는 것 아닌지 하는 의심이 들 정도로 골동품등이 많았다. 새봄이라, 길가마다 사람들이 나와 산책을 하고 있다. 유유상정이라고 필자와 똑 같은 카메라를 가진 나시족을 만났대리고성 안을 1시간정도 둘러보면서 아름다운 옛도시를 봤다. 바닥에 붉은 대리석으로 깔린 바닥과 길 옆으로 흘러 내리는 시냇물을 보면서 연신 입을 다물게 한다.
다. 반갑다며 악수를 청하고, 사진을 찍어 준다. 한번 더 가보고 싶은 곳이다.
2006년 2월2일부터 7일까지 운남성 곤명과 여강, 고성을 다녀왔다. 여강의 길이 아름답다는 것과 옥룡설산이 웅장하고 신비스럽다는 이야기 듣고 나선 여행길이었다.
생각하면 여강의 정겨움이 지금도 마음을 사로잡았다. 흙벽돌에 기와를 얹은 시골마을의 중간을 흐를는 물, 너비와 깊이가 약 1미터 정도씩인
유행상품이 넘치는 국제적인 상업도시 上海((상햐이)
상해의 거리라든지 명소는 당초 여행계획에 포함되어 있지 않아, 그저 ‘상해 임시정부’만 들르기로 한 스케줄이어서, 거쳐 가는 수순이었다. 가이드의 설명으론, 꼭 상해에 와서 볼걸이로는. 상해의 최대의 번화가 남경로를 말한다. 그의 말로는 ‘중국은 지저분하고 촌스럽다’는 편견을 가지고 계신분이라면 다음기회에 한번 상해를 여행하길 권하고 싶다고 말한다. 특히 상해의 최대 번화가라고 할 수 있는 남경로를 거쳐 외탄과 황포강 너머의 푸동지역을 보게되면‘중국은 최고를 멋지고 화려한 나라다’라는 또 다른 편견을 가지게 될지도 모른다.’ 고 말한다.
그중 남경로는 상해 제일, 아니 중국최대의 번화가라해도 과언이 아닌 곳으로 총길이 5km가 넘고 각양각색의 상점과 레스토랑, 백화점, 호텔들이 위치하여 주말이면 발을 디딜 수 없을 정도로 붐빈다. 남경로는 인민공원을 기준으로 동과 서로 나뉘는데, 남경동로에는 제일백화점을 비롯한 여러 백화점들과 패션 상점들이 있고, 남경서로에는 중국전통공예품과 차를 파는 상점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더붙여, 한국의 명동에 비견될 수 있는 이곳은 거리폭이 명동의 두배정도는 되어서 걸어다니기가 훨씬 편하고 또한 차가 다닐 수 없는 대신 그 사이로 미니열차가 수시로 관광객과 쇼핑객을 태우고 다닌다. 또한 거리 중간중간마다 쉴수 있는 넓은 의자들이 있어 지친 다리를 쉴 수 있게 해준다. 주말이나 휴일에는 그 길고 넓은 거리도 사람으로 가득차니 가능하면 평일에 여유롭게 쇼핑을 즐기는게 좋다. 하지만, 우리가 역사시간에 배웠던 1842년 남경조약으로 개항된 이후 국내외의 새로운 문물을 흡수해 온 국제적인 상업도시이다. 영국에 의해 중국최초로 개발될 당시 서방에 개방된 첫 항구도시요. 오랜기간의 외국조계지로 화려한 모습속에 이방인이 될 수 밖에 없었던 상해는 1945년 중국이 공산주의국가로 재탄생한 이후부터 등소평에 의한 개혁개방정치이 실시되기 전까지는 중국의 여느도시와 같이 별다른 발전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개방이후 90년대 중앙정부가 이곳에 집중적으로 투자를 시작하면서 동양의 또 다른 홍콩을 꿈꾸기 시작하였고, 지금은 세계적인 경제중심 도시가 되었다.
중국에 관한 선입견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상해는 새로운 눈을 열어주는 도시이다. 상해의 고층빌딩들은 다양한 디자인의 건축물을 장려하는 시정책에 의해 기발한 디자인으로 상해 스카이라인을 장식하고 있으며 과거 조계지로서의 흔적이 남아있는 외탄과 황푸강 바로 건너편 들쑥날쑥 쏟은 현대적 고층빌딩은 상해의 과거와 현재를 강 하나사이로 이어주는 듯한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6.000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는 상해의 총면적은 6,184km이며, 1.200만명이 넘는 인구를 가지고 있지만 그중 640만명은 도시의 외곽지역에 살고 있다. 역사속에서 중국의 어떤 도시보다 사양의 문물을 빨리, 쉽게 받아 들인 곳이기에 중국의 다른 도시와는 색다른 문화를 접할 수 있으며, 다양한 볼거리, 놀거리, 먹을거리로 수많은 관광객을 유치하고 있다.
중국속의 한국 ‘상해 임시정부’청사 가다
2일 상해에 도착후 바로 상해임시정부로 향했다. 가는 길마다 도시계획에 따른 철거작업과 도로확장 공사가 한창이었다.
우리가 임시정부로 알고 찾아가는 곳은 마당로(馬堂路)에 있눈 3층 벽돌집으로, 1926년부터 윤봉길의사의 의거가 있었던 1932년직후까지 청사로 사용하던 곳이다.
매우 낡고 도로옆에 위치해 있어서 언뜻 보면 쉽게 지나쳐 버릴 수도 있을 만큼 초라하지만, 하루에도 많은 한국인이 관광객들이 찾는 명소인 듯 하다.
1층에서 짧게 비디오 시청을 하고 나면 2층과 3층의 전시관을 관람하게 된다. 전시관내에는 당시 쓰였던 가구, 서적, 사진 등 전시되어 있어서 자료를 유심히 살펴 보는 것 또한 좋은 공부가 될 것 같았다. 건물내에는 작은 상점을 운영하여, 청사 유지비를 마련하고 있는데, 우표, 악세사리, 장식품 등 기념품을 한족(韓族)들이 팔고 있었다. 전시실의 사진촬영은 금지되어 있었고, 그 어려운 때에 독립자금을 받아, 좀 호화판생화를 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어 씁쓸한 마음을 버릴 수 없었다.
중국 운남성(云南省) 옥룡설산(玉龍雪山), 영원한 기쁨
여행일정
2006년 2월2일부터 2월7일까지
2일12시40분 중국 민항 MU 5044편을 부산 김해공항 출발
오후 13시20분 상해(푸동공항) 도착
오후 14시 20분 1)임시정부 청사 방문
2)상해시 보타구청 방문
오후 20시10분 상해에서 중국민항편로 곤명향발
오후 23시10분 곤명공항 도착
바로 ‘사꾸라 앵화’호텔 도착
3일 곤명-려강
*리프트로 운삼평-계단을 따라 옥룡설산 분지까지 걸어간다.
4일 석림-구향동굴-곤명
*호텔 조식후 운남성이 자랑하는 석림관광, 중식후 운남성 최대 석회동굴 구향동굴 관광
이번 중국 여행을 하면서, 법구경의 ‘길을 떠나가더라도 자기보다 나은 사람, 또는 비슷한 사람이 아니면 혼자 가는 것이 낫다, 그러므로 어리석은 동반자를 골라서는 안된다.’는 것과 ‘여행은 사람을 겸허하게 한다. 세상에서 인간이 차지하고 있는 인간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가를 깨닫게 하기 때문이다.라는 프랑스의 소설가’G. 플로베르.의 글귀를 생각게하고 있다가, 바삐 결정한 여행이다.
이번 여행에 ‘심광체반(心廣體胖)을 느끼게 했다. 풀이하면 ‘마음이 너그러우면 몸이 편안하다’는 것이다. 여행을 하면서 비행기를 3시간 반 동안 밤에 타보는 것도 처음이고, 6일 여행중 무려 14시간을 비행기로 이동한 것도 잊지 못할 추억이다.
중국이 크고 웅장하다는 느낌을 받은 날들이었다. 사람들은 깨끗하다는 느낌이 없었고 자전가가 많았고 자본주의를 받아들이는 과도기에서 아이들까지 동원하여 돈을 벌려는 사람들이 있었고,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다. 자연자원은 정말 많았고 그것이 국가경쟁력이 될 것 같았다. 개방과 개발을 마구하고 있었다.
소수민족이 살고 있는 운남성을 여행했다. 이곳은 아직은 많이 관광지화 되지 않은 곳이었지만
중전(샹그릴라)의 소포탈라궁과 백탑해... 장족의 자치주의였다.
라마승이 나오는 집안은 그 가문의 명예로 여기고 매장방식이 수장(물에 띄워서 보냄)과 조장(시체를 까마귀에게 던져줌)이었다.
자연에서 나서 자연으로 돌려주는 방법이었다. 해발이 높아 산소가 부족하여 고산병에 걸린다고 한다. 걷는것도 천천히, 숨도 천천히 쉬라는 말을 설마 하다가 내가 걸릴라 걱정이었다. 그것뿐이랴...두통, 가슴 답답함과 구역질.
여강의 옥룡설산의 만년설, 운삼평,백사백화, 고성... 만년설이 있는 옥룡설산이 보이는 고성, 여자가 농사짖고 남자가 집에서 독특한 상형문자로 공부하고 여지기 경제권을 가지고 있는 여권이 쎈 모계사회인 나시족의 자치주의였다. 길바닥이 돌로 되어 있는 고성의 운치를 느끼게 하는 곳이었다. 옛날에는 물물교환의 장소로 쓰였던 경제도시였다고 한다. 한번 더 가보고 싶은 곳이다.
려강(麗江 玉龍雪山)(5,596m)
려강이라고 하면 강을 연상하기 쉬우나. 이는 운남성 북쪽에 있는 해발 2000-2500m에 있는 분지로 소수민족인 나시족(納西族)이 사는 자치현(自治縣)을 말한다.
위치는 중국 운남성(云南省)이고 높이는 5.596m 이다. 려강의 옥룡설산의 만년설(萬年雪), 운삼평, 여자가 농사짖고 남자가 집에서 독특한 상형문자(象形文字)로 공부하고 여자가 경제권을 가지고 있는 여권이 쎈 모계사회이다. 산세가 남북으로 뻗어 있으며 길이가 35km, 폭 12km에 달한고 한다. 이산은 려강에서 약40분 소요된다. 옥룡설산의 만년설과 빙하(氷河)는 불과 10여년전만 해도 온 산을 덮었으나 지금은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윗부분만 덮혀있으며, 기상학자들은 인간의 화석연료사용으로 인한 지구온난화로 인하여 약 40년후에는 이 산의 만년설과 빙하는 완전히 사라진다고 한다.
옥룡설산에 오르기 위해 아침6시경 호텔을 나섰다. 설산에 오르기 위해선 리프트를 타고 운산평에 내려 약 20분정도 걸으면 된다. 벌써 리프트를 타기위해 줄을 이리저리 서 있어 족이나 약3시간 정도 걸려야 탈 수있을 것 같았다. 밖에서 옥룡설산을 보니, 감동 그 자체였다.
쿤밍(昆明)
인구 약 380만명으로 운남성 중국 남서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성도는 쿤밍이다. 북위 21-29도, 동경 97-106도에 위치하고 있으며 북회귀선이 운남성 남부를 지나고 있다.
운남성의 동부에는 꾸이조우(貴州)성과 꽝시쫭(廣西)족 자치구가, 북부에는 쓰촨(四川)성이 인접해 있고 서북부에는 시장(西藏)지치구, 서부에는 미얀마, 남부에는 라오스와 베트남이 있다.
운남성과 인접국가의 경계선은 약4천Km이다. 운남성은 고원산지로서, 칭장(靑藏)고원의 남부에 해당되는데, 평균고도가 해발 2000m에 이르고 서부산맥과 협곡으로 지형이 되어있어서 험난하다. 북부는 평균 3000-4000m, 남부는 1500-2000m로 고도차이가 크다. 서북방향으로 산맥은 줄지어 있는데 동남쪽은 상대적으로 낮다.
대리석으로 유명한 대리의 창산과 이해(바다같이 넓은 호수라 하여 바다해자를 쓴다고 하더라)의 유람선관광, 삼탑사 백족이 살고 있는 곳이다. 대리국으로 살다가 쿠빌라이칸에의해 정복당해 중국에 편입되었다고 한다. 창산에서 바라본 이해는 장말 낭만 그 자체였다.
사계절이 중국에서 제일 따뜻하여 항상 꽃이 피어 있다는 곤명, 이곳은 정치, 경제, 문화, 교통의 중심지라고 하는 오랜 역사를 가진 곳이라고 한다. 그레도 일교차가 커서 따뜻하게 입고 다니다가 더우면 벗어야 하는 곳이었다.
누어 있는 닮았다는 서산, 넓은 바다같은 호수인 곤명호. 위의 둘을 배경으로 시인이나 문장가들이 모여서 글을 썼다는 대관루, 서산에 가는 길에 늘려있는 기면품 가계에서 조각을 하는 것 것처럼 앉아 있는 처녀앞에 서 있으니 저것은 속임수라고 한다. 중국은 소이는 것이 생활화되어 있다는 말을 듣고 조심스럽게 중국인을 대했다.
대리
산과 거대한 호수 사이에 넓은 평야를 가진 대리, 대리는 쿤밍에서 서쪽으로 400km, 미안마 국경에서 불과 150km 떨어진 곳으로 히말리야 산맥의 한줄기인 창산에 자리잡고 있다. 대리는 운남지역의 옛 중심지이며 오래전부터 백족들의 삶의 근거지였다. 대리석이 많이 나서 도시 이름도 대리라고 불리고 있으며 지금도 30개의 광구에서 세계에서 가장 질이 좋은 대리석이 채굴되고 있다. 대리는 13세기 몽골의 침략을 받기전까지는 서남 실크로드의 중심지로서 남조- 대리왕국의 수도로서 500여년간 번성했던 곳이다. 1.900m에 위치한 대리의 주민은 대부분 백족이다. 56개 소수민족중에세 흰 것을 좋아하고 찰떡, 김치, 마늘을 먹는 것이 조선족과 비슷하다. 대리관광은 경관의 관광뿐만 아니라 역사관광, 민족관광인 셈이다. 삼국지의 제갈량이 맹획을 7번이나 잡았다가 놓아주는 곳이 이곳이며 맹획이 바로 백족의 선조라 하는 이족이다.
대리에는 삼도차가 유명하다. 쓰고 달고 무덤덤하며 씁쓸한 세 가지 맛의 차를 마신다. 이는 인생의 과정을 의미한다고 하는데 사람 태어날 때는 괴로워 울면서 태어난다. 그래서 첫 번째의 차 맛은 쓴 맛이다. 중년이 넘어가면서 행복한 시기가 온다. 이때는 단 맛이며, 말년은 인생을 다 살고난 후의 쓸슬하고도 무덤덤한 인생의 의미를 차맛으로 나탄낸다. 운남성은 94%가 산간지방이며 26개의 소수민족이 모여 살고 있다. 오후 시간에는‘삼도차’와 민속쇼를 관람했다. 여강에서 대리로 가는 길에는 고산지대의 농촌풍경을 한껏 구경할 수 있었다. 2.600m 고산지대의 녹색초원, 멀리보이는 구름과 촌마을모습, 염소와 양떼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다. 나는 중국 이 지방에 ‘운남설소’라는 난을 알고 있어. 몇 촉 살 요량으로, 화훼파는 곳을 찾았으나. 보이지 않았다. 가이드도 그런 것은 잘 모른다 했다. 그러나 이 길로 가다 보니, 가끔 난을 산채해 길기에서 팔고 있는 것을 볼수 있었다. 그러나 나를 위한 여행이 아니라. 그대로 지나쳐 버렸다. 아쉬운 감이 지금도 남는다. 멀리 보이는 구름에 빠쁜 것 없는 농촌정경은 우리 60년대를 보는 것 같았다. 대리시에 들어서자 백족을 상징하듯 집벽도 흰색이다.
이해(耳海)로 갔다. 이곳 대리의 자연경관 중 아름다움의 으뜸을 말하라고 하면 단연 ‘얼하이 호수’를 말할 수 있다고 한다. 중국에서 두 번째로 큰 호수로 사람의 귀처럼 생겼다고 해서 이해(耳海)라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바다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그 규모가가 크며 해발1.972m 고원에 위치한 호수로 창산을 뒤로 하고 있다. 유람선을 빌려 약40분간 관광하였다. 조그만 호수이나 바다가 없는 곳이라, 풍광은 아름다웠다. 바람이 살랑거려 조금 호수 깊은 곳으로 갔다가 뱃머리를 돌린다. 산에 구름이 두둥실 거리며, 산 자락엔 아직 덜 녹은 눈이 시야에 들어온다. 경치가 그만이다.
숭성사(崇聖寺 三塔,
대리 고성에서 북서쪽으로 1.5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탑으로, 하얀 탑신이 멀리서도 눈에 띈다. 정직 명칭은 숭성사삼탑, 3개의 탑 중에서 약 69m 높이의 16층탑이 가장 큰데, 특이한 건축 양식이었다. 나머지 2개는 42m의 10층탑이다.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9세기에 건축된 3개의 탑이라 한다.
하늘이 쾌청한 날이면 4.000m의 창산(蒼山)이 작은 호수에 비치는 모습이 아름답고 가이드는 설명한다. 바로 북쪽에 위치한 나시족의 민속마을 희주(喜州)를 찾았다. 이곳은 나시족이 건축양식을 잘 보존하고 있는 지역이라 한다. 집들은 3면이 방이고 한면이 벽인 형태로 백색과 흑색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각 벽에는 산수화가 그려져 있으며 독특한 형태를 보이고 있다.
石林(대석림, 소석림)
-천하 제일 奇觀의 명승지
석림 말 그대로 바위의 숲이었다. 원래 바다였지만 2억8천만년전의 지각 변동에 의해 석회질의 암반이 변형되기 시작하여 해면으로 노출된 부분이 비바람에 의한 침식과 지열등의 영향으로 깍이고 깍인 결과, 지금과 같은 모양으로 된것이다.
중국남부 윈난성의 성도인 쿤밍에서 가장 큰 볼 거리는 ‘석림’이란 말을 듣고 기대를 했으나. 말 그대로 돌들이 삐죽삐죽 서서 숲처럼 서 있는 놈들이 모여 있는 곳인데, 볼거리는 생각보다 없다. 신기한 것은 풍화작용으로 석림에는 다 저렇게 일정한 가로 방향으로 끊어졌다가 그 위에 도시 머리를 얹은 것 마냥 이어져 있는 모습이 쭈~욱 이어져있다.
한마디하면, 중국여행의 가장 큰 어려움은 이놈의 입장료인 것 같다. 석림처럼 자연적으로 생겨난것도 울타리 쳐놓고 무조건 돈을 달라한다. 철이 춘절이라, 중구사람들이 이곳을 보려 인산인해였다. 서로 밀고 밀며 좁은 길을 갈려니 땀을 흘리면서 아귀다툼하는 것처럼 가야하는 괴로움이였다. 그것 뿐이랴. 수석에 토기문양을 그려놓고, 이것 얼마요? 물어보면, 처음에는 8만원 하든 것이 5천원까지 내려가는 기이한 가격, 그것 하나 팔려고, 계속 딸아 다니며 깍고깍고 흥정을 할려한다. 어느곳이나 가면, 아낙들이 물감들이 앞치마를 들고 관광객을 따라 다니며, 사라고 졸라댄다.
원시인이 살았다는 구향동굴, 종유석과 석순이 있었다. 한국으로 돈을 주고 사서 모두 가져갈 수 없는 자연자원이었다.
다양한 민족을 다스려야 한다는 것도 중국의 문제점인 것같았다. 사람이 살아가는 것도 다양하다.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잘 사는 것인가? 우리도 우리사회의 도그마에 빠져살고 있지는 않는 지 나를 객관화해 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흑룡담에 갔다. 아름다운 정원이다. 햇살도 따스하고 동네 할머니들이 민속공연을 하고 있다. 나 오는 길에 동파민족문화 예술 이라는 간판이 있는 곳에 들어가 봤다. 동파하는 지혜있는 자를 가리키는 말이라고, 조선족 안내인이 설명한다. 서예가들이 작품이 전시장처럼 건물 둘레에 전시, 가격도 붙여있어, 판매를 하고 있다. 가격이 비싼 편이다. 작품하나가 얼마인지를 들여다보니, 약 20만원이 넘었다. 비싸다 하니 안내하는 아가씨가 작가에게 전화로 연락, 염가로 주겠다고 했다. 일행중 동파선생이 쓴 작품을 10만원주고 사는 분도 보였다. 특히 동파상형문자를 쓰는 갓쓴 노인이 안경넘어 우리를 쳐다 보는 눈이 예사스럽지 않았다.
백사고성에 갔다.
이곳의 왕들이 목(木)씨 성을 가져서 성주위에 벽을 쌓지 않는다고 가이드가 설명한다. 곤(困)이 되니까 그렇다한다. 그러나 벽에 그려진 상형문자 보면 볼수록 재미있다. 그림도 가옥양식이며 정원도 고풍스런 모습이다. 특이 종교가 이채롭게 느껴 졌다. 성스러운 곳이라는 허름한 건물에 라마교, 불교, 도교를 표시한 그림을 붙여놓고, 종교의식을 하는 곳이다. 카메라를 들여대자. 촬영금지라고 했다. 그러나 관리인이 눈을 돌리는 사이, 한컷했다. 중전(샹그릴라)의 백탑해... 장족의 자치주의였다. 라마승이 나오는 집안은 그 가문의 명예로 여기고 사후는 매장방식이 수장(물에 띄어서 보냄)과 조장(시체를 까마귀에 던져줌) 이었다. 잔여에 나서 자연으로 돌려 보내는 방법이었다. 해발이 높아 산소가 부족하여 고산병에 걸린다고 한다. 걷는 것도 천천히, 숨도 천천히 쉬라는 말을 가이드가 한다.
여강 대리(大理) 고성(古城)
대기 고성이 있는 여강은 마르코폴로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을 간직한 곳이라 극찬한곳으로 ‘아침에 좋고, 저녁에 좋고, 비오는 날에도 좋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어름답다. 중국의 소수민족 나시족은 옛날부터 여강의 빼어난 풍경과 온화한 기후,를 그들의 이상향으로 그려보면 살고 있다.
800년 된 고성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관광지이다. 시내를 흘러가는 맑고 깨끗한 시냇물은 아름답기 그지없다. 한마디로 고성은 ‘아름다움을 간직한 도시’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곳 여강에는 ‘나시족’이 대부분이며 나시족이 역사상 478년이나 이 지방을 지배하였다고 한다. 여간은 교통과 상업의 도시로 발달했는데 차마고도(茶馬古道)의 중심지로 곤명의 차, 사천성의 비단, 베트남의 비취, 티뱉의 우유가 이곳에서 물물교환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단연 관광도시로 탈바꿈하였다. 1996년 옥룡설산에 3.000여명이 죽은 대지진이 있었다. 중국 최고 지도자들이 이곳을 방문하게 되고 역강이 아름다움에 놀라 그 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1998년에 공항이 개설되고 1996년에 있은 곤명 원예박람회도 이곳을 관광지로 비약하는 큰 계기가 되었다 한다. 여강은 요즘 중국 최고의 관광지로 끄고 있는데 하루 관광객이 3만명이 넘는다고 한다. 여강시내에 호텔이 78개나 된다고 하니 짐작이 간다. 1997년에 여강고성이 새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는데 중국의 29개 세계문화유산중 28개는 한족이 도시에 있고 유일하게 소수민족(나시족)의 도시에 세계문화유산이 있는 셈이다. 여강고성은 주위가 모두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성이 없는 특이한 곳이다. 대신 미로(迷路)로 되어 있어 외침 때 황제의 굴을 찾지 못하게 설계 되어 있다고 한다. 아름다운 여강고성 내부를 오전 10시경에 관광하니 편리했다, 상점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이곳은 대리국이 도읍지였을 때 축성되었던 성의 흔적으로, 현재 대리 도시 전체를 감싸는 듯한 성벽의 일부와 남문과 북문이 남아있다. 성으로는 남문과 북문을 통해 올라갈 수도 있다. 성벽 안의 대리 시내에는 1-2층의 낮은 민가들이 죽 늘어서 잇다. 검은 지붕과 하얀벽이 대조적으로 보이는 이 모습에서 오랜 역사의 흔적을 예상할 수 있었다. 남문에서 북문까지 30분정도 산책하면서 집집마다 크고 작은 정원으로 잘 꾸면진 주택을 볼 수 있다. 길바닥이 돌로 되어 있는 운치, 옛날에는 문물교환의 장소로 쓰였던 경제도시였다고 한다. 이곳을 다 둘러 볼려면 7-8일이 걸린다 한다. 가는 길목에서 지난해 한국을 방문, 문화방송에 출연했다는 구필(口筆) 서예가 점포에 들였다. 보라하듯이 붓을 입에 물고 일필휘지를 한다. 가격은 글 넉자에 10만원, 잘쓴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상업성이 많은 것 같다. 3시간여 이골목 저골목 돌아다녀봤다. 서울 인사동 골목에 중국물건이 혹시 이곳에서 가져다 파는 것 아닌지 하는 의심이 들 정도로 골동품등이 많았다. 새봄이라, 길가마다 사람들이 나와 산책을 하고 있다. 유유상정이라고 필자와 똑 같은 카메라를 가진 나시족을 만났대리고성 안을 1시간정도 둘러보면서 아름다운 옛도시를 봤다. 바닥에 붉은 대리석으로 깔린 바닥과 길 옆으로 흘러 내리는 시냇물을 보면서 연신 입을 다물게 한다.
다. 반갑다며 악수를 청하고, 사진을 찍어 준다. 한번 더 가보고 싶은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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