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은 계절의 분수령, 가을의 영토이다. 햇빛부터 여리다. 햇빛이 여리면 햇볕도 선선하다. 늦더위가 꼬리를 흘려 있기는 하나 사람들은 염량(炎凉)의 절기 변화에 민감하다. 더위가 도리반거리다 가기는 갔다며 눈을 반짝일 만큼 사람들은 충동적이다.지글지글 끓던 태양의 세례에서 벗어났다는 것만으로도 가을날은 축복이다. 에어컨이나 선풍기 같은 메커니즘으로부터 풀려나면서 에둘러 오는 가을 공기의 청량함. 풀 먹여 다림질한 옷을 몸에 두른 것같이 사락사락 상큼하다.
빨랫줄처럼 쭉 뻗은 시선이 이르는 어디 한 곳 막힘이 없다. 티끌 하나 앉으면 흠이 될 머리 위의 벽공은 감정의 세정장치다. 찬물을 튕기며 제 머리 올올이 풀어 감는 폭포를 눈앞에 한 느낌이다. 눈길만 주어도 단박 가슴속에 고여 있던 감정의 묵은 찌꺼기들이 씻겨 내린다. 유영하듯 구름 따라 둥둥 떠가는 일탈의 이 삽상한 기분. 가을날은 이 모든 것들이 도대체가 낯설다.
늘 그 자리를 맴도는 일상에 대한 반란의 단초는 사소한 것에서 저질러진다. 자신을 낯설게 함이다. 10월은 가을의 한복판이고, 가을은 자신을 비춰보는 커다란 거울이다. 이 거울을 손이 닳도록 닦는 거다. 내 본연이 나타날 때까지, 내 원형이, 순수가 불쑥 얼굴을 내보이는 순간까지.
가을이라는 거울 속 잃어버렸던 ‘나’와의 해후, 오래간만에 대면하는 낯선 모습에 화들짝 놀란다. 나는 왜 그냥 그대로인가. 변화도 없이, 변화에의 적응도 없이, 불안한 암시 속에 눌어붙은 채 도사리고 있던 ‘나는 누구인가’의 쑥스러운 화두.지금, 짐 지고 있는 나의 삶의 무게는 버겁다. 아무데나 부릴 수 없는 인생의 이 하중은 어차피 내가 지고 가야 할 책무다. 그렇다면 살아 온 날들에 대한 회고에 잠기는 건 한낱 낭만적 감상에 지나지 않다. 살아갈 날에 대한 예단 또한 삶을 가슴 졸이게 할 뿐. 낭만적으로 내게 허여된 시간이 과연 얼마나 될 것이며, 예단을 인생의 마당에 올릴 만큼의 무대구성과 소도구의 동원과 프로다운 연출은 가능한 것인지.
이 대목에 이르러 주춤한다. 낭만과 예단이 비단 오늘의 일은 아니다. 인생을 엮으며 일관해 온 방식대로 풀어야 하는 것이지만, 아무래도 지금은 어제가 아니고 내일은 오늘이 아니다.
어느 스님은 지인에게서 받아 애지중지하던 난분을 도반에게 주어버렸다고 한다. 작은 소유에 집착하게 됐기 때문이다. 집착은 구속이고 자업자득이다. 무애의 삶을 살려는 사람에게 작거나 적거나 소유는 장애물이다.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 우리는 이 세상에 올 때 무엇 하나 가지고 온 게 없다. 그러니까 비워야 한다. 비우려면 버려야 한다. 한데 버리는 게 맘먹은 대로 되지 않는다. 버리려다 갖고 싶은 욕망의 허우대를 키우니 문제다.
맑게 갠 가을날, 저 산에 눈을 준다. 가을 햇살에 반짝이는 나뭇잎들이 눈부시다. 나뭇잎들은 봄, 여름을 지나오며 오달지게 제 몫을 다했노라 느긋한 표정을 짓고 있다. 치열한 수액작업과 광합성이 꽃을 피우고 열매로 영글고 있지 않은가. 당차고 실팍하고 여무지다. 저 잎들은 머잖아 가을이 저물 무렵 서나서나 져 갈 것이다. 곡예 하듯 허공을 몇 바퀴 구르며 스산한 춤사위로 숲속에다 몸을 눕힌다. 비 맞고 눈 맞으며 썩어 문드러져 흙이 되는 게 저들의 소망이다. 몸을 받은 곳으로 귀의하는 육보시의 모습이 처연히도 아름답다.
공양하듯 훌훌 털어 기여하는 나무는 성자다. 나무를 본받을 수 없을까. 이 가을날, 나는 저 산을 바라보며 한 그루 나무속으로 들어간다. 내 육신이 나무로 환생하는 윤회의 길을 걷고 싶다. 무엇을 더 가질 것인가. 무슨 낭만이며 예단인가. 내게 과제가 하나 있다. 비우는 일이다. 가을날, 나무에게서 한 수 배운다.
빨랫줄처럼 쭉 뻗은 시선이 이르는 어디 한 곳 막힘이 없다. 티끌 하나 앉으면 흠이 될 머리 위의 벽공은 감정의 세정장치다. 찬물을 튕기며 제 머리 올올이 풀어 감는 폭포를 눈앞에 한 느낌이다. 눈길만 주어도 단박 가슴속에 고여 있던 감정의 묵은 찌꺼기들이 씻겨 내린다. 유영하듯 구름 따라 둥둥 떠가는 일탈의 이 삽상한 기분. 가을날은 이 모든 것들이 도대체가 낯설다.
늘 그 자리를 맴도는 일상에 대한 반란의 단초는 사소한 것에서 저질러진다. 자신을 낯설게 함이다. 10월은 가을의 한복판이고, 가을은 자신을 비춰보는 커다란 거울이다. 이 거울을 손이 닳도록 닦는 거다. 내 본연이 나타날 때까지, 내 원형이, 순수가 불쑥 얼굴을 내보이는 순간까지.
가을이라는 거울 속 잃어버렸던 ‘나’와의 해후, 오래간만에 대면하는 낯선 모습에 화들짝 놀란다. 나는 왜 그냥 그대로인가. 변화도 없이, 변화에의 적응도 없이, 불안한 암시 속에 눌어붙은 채 도사리고 있던 ‘나는 누구인가’의 쑥스러운 화두.지금, 짐 지고 있는 나의 삶의 무게는 버겁다. 아무데나 부릴 수 없는 인생의 이 하중은 어차피 내가 지고 가야 할 책무다. 그렇다면 살아 온 날들에 대한 회고에 잠기는 건 한낱 낭만적 감상에 지나지 않다. 살아갈 날에 대한 예단 또한 삶을 가슴 졸이게 할 뿐. 낭만적으로 내게 허여된 시간이 과연 얼마나 될 것이며, 예단을 인생의 마당에 올릴 만큼의 무대구성과 소도구의 동원과 프로다운 연출은 가능한 것인지.
이 대목에 이르러 주춤한다. 낭만과 예단이 비단 오늘의 일은 아니다. 인생을 엮으며 일관해 온 방식대로 풀어야 하는 것이지만, 아무래도 지금은 어제가 아니고 내일은 오늘이 아니다.
어느 스님은 지인에게서 받아 애지중지하던 난분을 도반에게 주어버렸다고 한다. 작은 소유에 집착하게 됐기 때문이다. 집착은 구속이고 자업자득이다. 무애의 삶을 살려는 사람에게 작거나 적거나 소유는 장애물이다.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 우리는 이 세상에 올 때 무엇 하나 가지고 온 게 없다. 그러니까 비워야 한다. 비우려면 버려야 한다. 한데 버리는 게 맘먹은 대로 되지 않는다. 버리려다 갖고 싶은 욕망의 허우대를 키우니 문제다.
맑게 갠 가을날, 저 산에 눈을 준다. 가을 햇살에 반짝이는 나뭇잎들이 눈부시다. 나뭇잎들은 봄, 여름을 지나오며 오달지게 제 몫을 다했노라 느긋한 표정을 짓고 있다. 치열한 수액작업과 광합성이 꽃을 피우고 열매로 영글고 있지 않은가. 당차고 실팍하고 여무지다. 저 잎들은 머잖아 가을이 저물 무렵 서나서나 져 갈 것이다. 곡예 하듯 허공을 몇 바퀴 구르며 스산한 춤사위로 숲속에다 몸을 눕힌다. 비 맞고 눈 맞으며 썩어 문드러져 흙이 되는 게 저들의 소망이다. 몸을 받은 곳으로 귀의하는 육보시의 모습이 처연히도 아름답다.
공양하듯 훌훌 털어 기여하는 나무는 성자다. 나무를 본받을 수 없을까. 이 가을날, 나는 저 산을 바라보며 한 그루 나무속으로 들어간다. 내 육신이 나무로 환생하는 윤회의 길을 걷고 싶다. 무엇을 더 가질 것인가. 무슨 낭만이며 예단인가. 내게 과제가 하나 있다. 비우는 일이다. 가을날, 나무에게서 한 수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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